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게임을 하면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오는 느낌이 제법 괜찮은 날이었다.
보통은 큰 아이가 벨을 누르면서 장난을 치는데 작은 아이가 문을 두드린다. 아 또 장난 치는구나 하고 느리적거렸다. 그때 작은 아이가 <엄마 언니 차에 치였어>라고 소리를 친다. 현실감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급하게 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에 <언니랑 오는데 차가 와서 언니가 날아갔어>라는 대답을 듣고 실내복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미친 듯이 뛰었다. 제발 제발 최악의 상황은 아니기를 바랐다. 작은 아이도 책가방을 그대로 멘 채 앞서 뛰어갔다. 뛰어도 뛰어도 안 나온다. 거의 피아노 학원에 다다라서야 누군가 바닥에 누워있고 머리를 손으로 바치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내 아이와 가해자로 보이는 여자다.
나는 아이 바로 앞까지 달려가 무릎을 꿇고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아이는 살아있었다. 나를 보며 큰 아이가 <엄마, 미안해>라고 한다. 왜 네가 미안하니. 감사하다. 살아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그렇게 읖조렸다. 아이 손을 잡고 괜찮다고 말했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경찰을 부르고 119를 불러주었다. 어떤 한 할아버지는 모든 걸 촬영해주고 있었다. 가해자는 되려 나보다 더 패닉에 빠져있었다. 내가 괜찮을 거라며 다독여줬다. 얼마 안 가 경찰이 오고 119가 도착했다. 119에 작은 아이와 함께 타고 출발하다가 집 부근에서 멈췄다. 의료파업으로 인해 길병원이 없어 여기저기 전화로 받아 줄 곳을 알아보더라. 나는 핸드폰도 없이 맨몸으로 나왔기에 양해를 구하고 아이 책가방을 집에 둘 겸 집으로 뛰어갔다. 몇 번의 입원이 있기에 필요한 물품과 지갑 그리고 핸드폰을 챙겨 119 앰뷸런스가 서 있던 곳으로 뛰어갔다. 울지 않았다. 나도 아이도. 우리는 다행이다 감사하다만 외치며 앰뷸런스를 타고 이동하고 또 이동했다. 공황장애가 있어서 막히는 도로의 차를 타지 못하는데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신을 다잡고 다잡으며 최선의 긍정회로만 돌렸다. 의료파업으로 인해 우리는 세 번째 병원에서야 처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 119 대원분들은 최종인계까지 지켜보고 가셨다. 과정에서 모든 분들께 감사했지만, 특히나 그분들께 너무 감사했다. 의료파업으로 인해 이분들의 업무가 가중되고 그 피로도를 알 수 있었다. 그때 당시에 의료파업으로 앰뷸런스 안에서 죽은 사람들 얘기가 심심치 않게 뉴스에 나왔다. 하마터면 우리 아이도 그랬을 거다.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다행히 받아주셨다. 응급실에는 사람이 몇없는데다가 어린아이가 흔치 않은 곳이라 다들 안타까워하고 귀여워해주셨다. 병원까지 오니 안심이 되었는지 아이의 표정이 나아졌다. 아이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나도. ct 촬영을 하고 담당의사가 골반이 골절이 났다고 알려주셨다. 다행히 이 분이 그 시간까지 계셨고 아이가 어려서 다음 날 수술을 1순위로 빼주셨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해맑게 아이에게 달려가 <골반 뼈만 부러졌데 ㅎㅎ> 이렇게 외쳤다. 응급실의 모두가 놀랬다. 골반 부러졌다고 좋아하는 엄마는 첨 봤단다. 골반이 부러지기만 하고 어디 박히지도 않았고 하반신도 문제없고 걸을 수 있고 모든 것이 감사해서, 아이에게 너무 감사하다고만 했다. 다행이라고만 했다. 그 과정에서 <왜?>, <왜 우리 아에게 사고가?>라는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지금도 절대 하지 않는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안 하고 있다. 아이는 부러진 골반의 통증 때문에 끙끙대며 힘들어했다. 수술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갖고 수술하러 들어갔다. 예상시간은 3~4시간이었는데, 한두 시간이 흘러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중환자실에 있다는 문구가 뜬다. 그때 무너져 내렸다. 처음으로 남편을 붙잡고 오열했다. 소식을 들은 아빠는 택시를 잡아타고 오셨다. 택시운전하시는 분이 너무 떨리고 놀라서 그러셨단다. 아직 중환자실인 데다가 누구도 만날 수 없기에 곧장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어려서 핀을 잘라 써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회복하는 걸 지켜보기 위해 중환자실에 간 것이란다. 수혈을 받으며 그림도 그리고 귀염을 받는 딸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와, 너 이제 니 몸에 다른 사람 피가 흐른다. ㅎㅎ> 떨리는 목소리와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아이와 인사한 후 나왔다.
그 후로 병원 생활이 이어졌다. 아이는 10분에 한번씩 자세를 바꿔줘야 했고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저 그것밖에 할 게 없지. 다행히 어린 아이라 모두가 놀랄 정도로 회복이 빠르고 움직임도 빨랐다. 그리고 3주나 씻지 못한 딸의 몸에서 꼬리꼬리한 냄새도 났다. ㅎㅎ 재활병원으로 이송을 했는데, 바로 옆자리 분이 6개월 전 아이와 비슷하게 사고를 났는데 아직도 회복을 잘 못하고 계신단다. 아이가 어려 회복이 빠르고 여기에서 무언가 더 할 수가 없어서 1달만 있다가 퇴원을 했다. 담당의와 상담을 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게 되어 구청에서 지원하는 휠체어도 대여하고 언덕 위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교장선생님도 담임선생님도 여러 학부모님도 도움을 주셔서 여름이 다가오는 그 시점에 아이와 신나게 학교에 가고 이른 하교를 해서 놀며 회복을 이어갔다. 아이는 차츰 걷기 시작했고 어느덧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고장났다. 공황장애가 원래도 있었지만 신경이 너무 예민해졌다. 아이가 나아지면서 민화수업도 가고 악착같이 붙잡고 있었는데, 그게 어느 날 뚝 끊어졌다. 아마도 몇 년 치의 긍정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것이 아닐까 싶다. 다행히 엄마라는 직함이 저 밑바닥까지는 끌고 가지 않는다. 아이들 다 클 때까지는 건강해야지 싶어서 헬스장도 다니고 좋은 것도 찾아먹고 좋은 얘기도 찾아 듣고 있다.
아이는 핀 제거 수술을 올 초에 또 받았다. 다들 엄마라고 자세히 말해주지 않나 보다. 사고때 가해자가 한눈을 팔아서 아이를 덮쳤던 것도 안보여주고, 의사 선생님은 사실 골반이 90도 박살 났고 반대쪽 골반도 골절이 있음을 이제야 자세히 말해주셨다. 잘한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핀제거 수술을 받고 또 아이는 잘 걷고 뛴다. 성장판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주의를 들었고 계속 관촬해야하고 수술자국이 너무 크게 남아있지만,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매일 밤 기도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 뿌러지지 않고, 자기 수명 다 살다가 '자연사'하게 해 주세요.>
부귀영화 다 필요 없다. 자연사가 최고인 것 같다. 그리고 공황장애로 다 끊고 집안에만 있어도 자꾸만 불러주는 분들 덕에 차츰 몸도 마음도 나아지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운전을 못할 것 같다. 너무 무섭다.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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